연속되는 질문의 피드백 / by Mullae Resonance

류한길
(사운드아티스트)

아래는 문래 레조넌스 1회를 진행하기 위해 작성했던 기획문이다.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 서울에서 소리란 일상 속에서 넘치고도 남는 것 정도로 인식된다. 상대적으로 정적 보다는 노이지한 환경 속에서 소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기에는 불리한 조건임은 사실이다. 너무나 당연해진 것들은 다시 돌아볼 여지 자체가 약화되고 시각 중심적 문화 또한 이러한 소리 환경을 오히려 둔감하게 또는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보충적 소재 정도로 인식하게 만든다.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 사회 전반적 기조들은 모조리 소리의 문제에 대한 주체적 사유를 방해하는 기재로 작동한다. 옷 가게나 호프 집에서는 음악을 거리로 출력하고 번화한 거리의 음향적 풍경은 사방에서 야외로 출력되는 음악으로 인해 소리의 문제를 음악의 문제로 혼동하는 지점까지 우리의 감각 체계를 몰아간다.
따라서 소리의 문제는 단순히 감각적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 맥락과도 떨어질 수 없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자본 사회의 속성에 의해서 형성되는 이 거대한 음향적 스펙터클 앞에서 개별적 주체들은 방관자의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소리는 다시금 개별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지점이 되었다. 서울의 특질적 소리 풍경 속에서 방관자 또는 무분별한 소비자의 입장으로 밖에 위치 지을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는 소리의 문제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거기에서 독자적으로 가능한 개별적 미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래 공진(Mullae Resonance)은 이런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소리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개별적인 반응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실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오픈 된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 되었다.
예술계에 사운드 아트가 등장한 이후로 여러 가지 텍스트가 유행적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우리는 지식의 이해 보다는 감각적 경험을 먼저 생각해보고자 한다.
또한 음악에 포함되는 영역으로서 이해되는 소리가 아니라 음악이 광범위한 소리의 영역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선택과 시도 가능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고도로 산업화 된 도시 서울 안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소규모 공업의 풍경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문래동은 이러한 관점을 실천해 보기에 여전히 유효한 공간이다.
문래 공진(Mullae Resonance)은 현 시점에서 시도 가능한 주제들, 방법론을 선택하여 현재 관련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초청 작가와 함께하는 두 개의 워크숍과 공연, 전시의 형태로 진행한다.

필자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기획과 진행을 했다. 지금 이 글을 다시 살펴보면 약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무엇이 변했고 어떻게 새롭게 재고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최초의 기획으로부터 크게 세가지 주제 즉, ‘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소리를 어떻게 선택하고 활용할 것인가?’, ‘소리는 어떻게 다른 것들과 연결되거나 관계되어 있는가?’를 바탕으로 워크숍의 형식들을 풀어내면서 세부적으로는 ‘소리의 데이터화’, ‘청각 경험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 소리들의 적극적인 청취’, ‘즉흥적 활용’, ‘언어, 공간과 연결되는 맥락들’, ‘음악을 탈구 시키는 음악’까지 진행하였다.

소리의 물리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은 그것이 연속적인 운동 에너지임에도 우리가 영구히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 붙잡아 놓으면 매우 빠르게 변질되거나 변형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소리와 음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뿐이고 그 기억을 말하거나 서술할 때, 우리에게 그 소리를 정확하게 지시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듣고 있고 우리의 청각 기관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빠르게 떨리고 있으며 그 떨림을 통해 우리의 신경 체계는 지금도 이 들려온 것들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말하는 방법도 모른다.

이 문제를 바탕으로 연결될 수 있는 맥락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우리의 발성 기관인 입과 성대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어떤 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개가 짖는 소리를 알고 있고 그것을 입으로 흉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리의 흉내를 의성어라는 언어 방식에 따라 글로서 기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가 짖는 소리를 글로 표기하고자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멍멍”이라고 써 있는 글을 다시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소리가 정말로 개가 짖는 소리를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국가, 언어, 문화권의 표기 또한 모두 다르고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또 모두가 다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언어는 우리가 듣는 소리를 언어로 재현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 부정확한 언어들은 언어 기호로서 어딘가에 기입이 될 수 있고 데이터화가 가능하다. 소리의 기록 또한 데이터화가 가능하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 하나의 정보로서 공유되고 재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간의 번역(decoding)을 거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언어 정보의 데이터를 소리 정보의 데이터로 읽어내면, 소리 정보의 데이터를 언어 정보로 읽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언어 정보는 언어적 속성을 읽어버리고 불규칙한 노이즈로 재현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소리 정보는 언어 정보로 바뀌지만 읽어낼 수 없는 분해된 단어 조합처럼 보일 것이다.

이 문제들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청각 능력이 매우 제한적이기에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소리 중에 극히 일부분만 들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전기적 증폭의 힘을 빌어와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 귀의 능력은 개별적 차이가 있지만 크게 20Hz에서 20KHz로 정의된다. 우리가 전기의 증폭을 통해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주파수 영역 안에서도 증폭되는 양에 따라 들을 수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가질 수 있음을 뜻한다. 소리가 언어로 번역되어도 언어 자체의 재현, 기록 능력은 부족하다. 소리가 데이터로 변환되어도 데이터 변환의 알고리즘이 없으면 원래의 소리, 원래의 번역된 언어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이 사실은 소리가 번역되는 장치들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증폭 시키는 장치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제 증폭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증폭이 적절할 때, 더 분명한 청취, 더 구체적인 정보성이 (여전히 그것이 부정확한 것이라 해도)획득된다. 그러나 증폭이 높거나 낮으면, 문제는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증폭이 낮으면 증폭을 거치지 않은 정보의 불분명함과 거의 동일하게 인식되고 증폭이 높으면 또 다른 정보로 변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증폭의 국면은 소리와 공간의 문제로 연결되어 공간의 흡수와 반사 그리고 피드백을 통해 새롭게 변형된 정보와 청취 가치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새롭게 드러나는 청취의 국면을 일종의 허구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소리가 아닌 비-자연적인 것이다.

현대의 음악은 드러머가 실제로 드럼을 연주하지 않아도 그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압력을 증폭과 피드백을 통한 소리 합성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청취 감각이 자연으로부터 경험 되는 것이라면 증폭의 결과는 비-자연적 소리의 등장으로 인해 자연이라는 인식 자체에 새로운 층위를 제공하게 된다. 자연 자체는 결코 생성하지도 전달하지도 않는 비-자연의 소리는 이제 자연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 사이 사이의 청취의 감각은 허구의 생산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청취 능력이 가지고 있는 제한적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많은 역사적인 장치들이 필요로 했다. 우리가 어떤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장치들 즉, 언어, 번역, 전달, 증폭을 빼놓고는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 지고 있다.  이제 소리 자체, 장치들 그리고 그 사이에 연결되고 생성되며 새로운 궤적을 그려내는 모든 것들에 대한 동시적인 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것을 따로 분리하여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라는 것 자체가 연속된 운동이고 그 연속된 운동의 반복되는 패턴이 존재할 때, 여러 장치들을 거쳐 우리의 인식틀 안에서 재구성해내는 모든 세세한 과정이 균등하고 동시적으로 사유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단기 워크숍이 위에 거칠게 서술한 맥락들 모두를 다루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장기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결과 예측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소리의 복잡성과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세부적인 문제들을 직시해야 한다. 소리를 소리 그 자체로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것을 보충하는 장치들의 맥락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는 직접적인 실천의 방법을 고안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어떤 유의미한 이해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정보 아카이브 장치의 활용 밖에 뚜렷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장담하듯이 적어나갔던 과거의 기획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불분명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과거의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강력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소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접근은 끊임 없이 연속되는 질문의 피드백을 만들어 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연속되는 질문의 피드백은 다시 다양한 청취의 경험들, 그 경험의 기록들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